그림자 밟기
연쇄 성폭력 사건의 범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실체와 그림자의 전쟁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리는‘성폭력’사건들.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사건으로 여겨졌던 성폭력 사건이 이제는 우리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도 손길을 뻗고 있다. 특정한 대상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무도하게 벌어지는 이 범죄는 이제 사각지대가 없는 듯 보인다. 용산 어린이 성폭행 살인사건, 서울 마포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속칭 발바리의 패륜적 범죄, 교도소 여성 재소자 성추행 사건,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 등, 10년 넘게 시행되고 있는 성폭력특별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폭력범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러한 성폭력 사건으로 육체적 고통 외에도 평생을 씻기지 않는 정신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피해자들 앞에서 오히려 가해자들은 당당할 정도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가정의 파탄을 막기 위해, 자신이 처신을 잘못해 당했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 사실을 감춘 채 거짓 증언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1998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조사한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6퍼센트 남짓에 그치고 있다.
이렇게 가해자보다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을 당하고선 주변 가족에게까지 버림받는 사람들의 그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까? 내가 성폭력 사건의 당사자가 된다면, 내가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그 아픔의 무게를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건의 단적인 개요만을 듣고선 그저 남의 이야기인양 지켜볼 뿐 그들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에 소설 속 주인공처럼 경찰의 길과 시인의 길을 병행해온 저자 박병두는 성폭력 사건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그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심리적인 기법으로 묘사했다. 경찰이라는 직분으로 인해 성폭력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했던 저자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그 어떤 상처보다 쉽게 아물지 않음을, 그리고 사건의 가해자들이 어떤 식으로 극악무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려낸 이 소설은, 누가 범인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수사관인지 알 수 없게 된 미묘한 성폭력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피해자를 넘어 범죄자로까지 내몰리게 된 한 경찰관의 은밀한 내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포착해냄으로써, 부조리와 범죄가 만연한 이 세상의 낯선 단면 하나를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순진무구한 영혼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소생하는지를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삶의 경이와 사랑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한다.
맑고 건강한 눈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생생하게 포착해낸 우리 시대의 문제작
진눈깨비가 퍼붓는 크리스마스 무렵의 어느 오후, 위성도시의 한 주택가에서 2인조 강도에 의한 사건이 벌어진다. 금품을 노린 단순 강도 사건으로 신고를 받고 현장을 찾아간 순경 남도영은 그러나 피해자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린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인 그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하고도 이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질 경우 가정이 파탄 날 수 있다면서 남도영에게 사건을 은폐해 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남도영은 피해자의 절박한 요구를 묵살하지 못해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은밀히 수사를 진행하지만, 사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강도들은 사건이 은폐된 것을 알아차리고 피해자에게 협박을 하고, 나아가 그녀의 남편에게까지 당당히 자신들의 존재를 밝힌 것이다.
마침내 도영은 사건을 은폐한 비리 경찰로까지 내몰린다. 이 사건으로 도영에게는 중징계와 이혼이 대가로 돌아왔고, 파트너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불행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게다가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사건의 충격에 못 이겨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사건이 그에게 주어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남도영에게 펼쳐지는 운명의 장난,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고자 폭력적인 대결 속에서 피어나는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