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구한말, 천주교도였던 아버지의 참수광경을 목격한 후 종교에서도 마음을 돌리고 한량으로 살아가던 서한중. 그러나 마음없이 나가던 천주교회 공소에서 사리댁을 만난 후 그에게는 한 여자가 삶이자 종교가 되었다.
장성한 자식을 둔 양반가문의 남자와 늙은 지주의 첩으로 살아온 여인. 이들이 가정과 도덕, 종교를 버리고 선택한 사랑의 도피 길에서 여인은 눈이 멀고 사내는 절름발이가 된다. 그러나 모든 희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은 애국과 신앙만큼이나 소중한 그들 삶의 순결한 가치다.
시대의 소용돌이 가운데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두 사람의 삶에서 인간으로 살아가 는 우리들의 욕망과 갈등이 아프게 묻어난다.
공소에서 사리댁과 처음 눈이 마주친 어느 여름날 낮을 서한중은 잊을 수 없었다. 장옷을 반쯤 벗은 그 여인의 월태화용(月態花容)한 용자를 보는 순간, 그는 너무 어리쳐 홀연히 자 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시원한 물가 옆 정자에 누워 물소리를 죽침 떨림으로 들으 며 아쉽고 황홀한 낮꿈을 꾸고 난 듯한, 신비로운 마음 두근거림이었다. 화류 여자를 보았을 때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내 나이 이미 마흔을 넘 겼는데 그럴리야 없지. 지성소(至聖所)에서 만난 지아비둔 아녀자 교우에게 음탕한 이심을 품다니…… 그는 읍내 술집을 찾아 논다니를 희롱하며 그 여인을 애써 마음에서 지워냈다. 술에 취해 논다니를 품에 안거나 투전판을 애써 기웃거리며 여인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주 일만 되면 도담스러운 여인의 용자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저자소개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분단문학의 대표적 작가. 월북한 공산주의자를 아버지로 둔 멍에를 문학적 화두로 승화하여 빛나는 작품들을 다수 창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6·25 이전 남한에 살면서 가족에게도 자신의 활동을 숨기고 지하활동을 한 공산주의자였다. 전쟁 전 남로당 경남도당 부위원장, 인공 치하 서울시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을 지내다 서울 마지막 철수팀으로 월북했으며, 유격대 간부로 남하, 52년 3월까지 태백산맥 등지에서 활동했고, 제네바 남북 포로교환협상에 북한 대표단으로 참가했다니 고위급 인사였던 모양이다. 1953년 남로당 숙청 후 몰락과 복권을 되풀이하다 1976년 강원도 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데올로기를 쫓아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김원일의 가족에게는 당장의 생존이 절박한 문제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대구 시장 바닥에서 과일 껍데기를 주워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막내 동생이 요절한 원인도 그 시절의 지독한 가난에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김원일의 생각이다.
그러나 분단의 멍에를 진 궁핍한 가정이 김원일의 문학에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1950년 아버지와 이별할 당시 겨우 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등단 이후 김원일은 아버지를 상정한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를 작중 인물로 등장시키며, 아버지를 문학적으로 복원시켜 나갔다.
1998년에 들어서야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김원일이 소설 속에서 그려 낸 아버지의 모습은 실제의 아버지와 흡사하였다. 30년 넘게 김원일의 문학세계를 지배했던 `분단문학`은 초기작 <어둠의 혼>과 장편 <노을> <불의 제전>, 그리고 , <마당 깊은 집> 등에 잘 표출되어 있다.
동생 김원우씨도 1998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