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 한 시간
퇴임 후가 더욱 빛나는 ‘아름다운 지도자’ 지미 카터
1924년 플레인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지미 카터는,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하여 평범한 장교 생활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의 가업을 이어받고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닉슨의 속임수에 질려버린 유권자들은 다음 대통령은 좀더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이길 원했고 그래서 찾아낸 인물이 바로 조지아의 주지사를 지낸 지미 카터”였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그의 백악관 생활은 실패와 시련의 연속이었고, 결국 패배한 대통령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세계 평화의 전도사이자 집 없고 헐벗은 사람들의 후원자로 대통령 시절보다 더 멋진 ‘대통령 이후’를 보여 주었고, 지난 2002년에는 수십여 년 동안의 국제 분쟁을 중재하고 인권을 성장시키며,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내는 성장의 비밀
한 시골 소년이 대통령, 더 나아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열쇠는 어디에 있었을까?
한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작용하는 힘들은 무엇일까? 과학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타고난 유전자가 그 모든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이 전적으로 태생적 요인에 기인한다면, 우리네 삶은 운명에 의해 이미 정해진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반적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해처럼 찬란하게 떠오른 여러 위인들의 탁월한 삶은 단순한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노라는 고백처럼, 한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성장의 과정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과 친지들, 가정과 교육적 환경, 그리고 또래 친구를 비롯해 가까이서 영향을 발휘한 주변 인물들 모두가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바람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해뜨기 전 한 시간’… 그 시간적 지점에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낸 비밀이 담겨 있다.
《해뜨기 전 한 시간》에는 고향과 가족과 친구를 사랑한 한 소년이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의 감동적 기록이 담겨 있다. 성공한 인물의 또 다른 표상으로 떠오른 지미 카터의 성장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뿐더러 수많은 부모들이 함께 읽고 교육의 지침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를 만들어 간 유전자 지도
엄격함과 근면의 상징, 아버지
지미 카터는 1924년 미국 남부의 조지아주 플레인스 근교에서 태어났다. 근면하고 사업 수완이 좋고 나름의 온건주의 철학을 지닌 아버지와, 다독을 중시하고 다소 진보적이며 간호사로 사람들을 돌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플레인스의 아처리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농장을 경영하는 아버지로부터 근면과 정직성을 배우고, 농장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 큰 야망이었던 어린 시절의 지미는 일꾼들에게 마실 물을 나르는 일부터 시작하여 옥수수와 땅콩, 목화 등의 재배 기술을 익혀 나간다. 아버지의 자린고비 정신으로 가축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이발한 머리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어떨 땐 친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정하고 혹독한 아버지 때문에 속상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냥 모임에 항상 함께 동행시켜 주고 낚시의 즐거움과 숲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 준 아버지 덕분에 그는 인내와 정의의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네 살 때의 일이다. 한번은 새로 이사갈 집을 구경하러 갔는데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미에게 창문 틈으로 들어가 문을 열게 하는데, 지미가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쓸모 있는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지미는 누구나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에 따라 집안이나 농장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간다. 다섯 살 때 처음 플레인스의 중앙로로 나가 삶은 땅콩 장사를 하고, 여덟 살에는 투자자와 재산 보유자로서의 첫 사업이 시작되었다.
독서를 좋아한 사랑의 천사, 어머니
지미의 어머니는 식탁에서도 책을 놓지 않던 열광적인 독서가였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지미는 평생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로서 흑백을 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의 봉사를 베풀며 살아가는 어머니는 그에게 열린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정신적 근간을 뿌리 깊게 심어 주었다.
대공황기 시절 떠돌이 거지들은 카터가 농장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집에 비해 유독 유랑자들의 방문이 잦았던 것은 집앞 우편함에 그 집 안주인의 호의도가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그들을 박대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남은 음식 한 조각이라도 주며 따스하게 대해 준다.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는 농장 인부들에게는 최소한의 약품이나 치료를 제공하고, 그들의 식생활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어머니의 생활 태도는 훗날 기독교적 신앙에 기초한 사람과 사회를 향한 지미 카터의 끝없는 사랑과 봉사 정신으로 이어진다.
자아 형성에 영향을 준 흑인들
당시 재건기를 맞은 미국 사회에는 ‘분리하되 동등하게’라는 인종 차별 정책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남부 조지아주는 흑백 분리의 역사적 뿌리가 깊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미는 노예에서 소작농이나 일일 노동자로 전락한 흑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윌리엄 목사였다. 어린 지미의 눈에 비친 그는 성공한 인물의 모델이었고, 그로부터 미래에 대한 야망을 꿈꾼다. 그는 아버지가 윌리엄 목사를 만날 때는, 흑인은 앞문으로 드나들 수 없다는 원칙을 깨지 않기 위해 직접 마당으로 나가 대화를 나누곤 하던 모습을 보며 자라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흑인으로는 잭과 라헬 클라크 부부가 있다. 농장의 하루는 농장 감독인 잭 아저씨가 해뜨기 전 한 시간에 치는 시작종으로 시작된다. 부모님은 지미가 그들 부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를 바랐고, 농장에서의 실제적인 생활은 어쩌면 부모님보다 그들로부터 더 많이 배운다.
카터가에는 각별한 웹스터 농장에는 아버지가 오랜 친구로 여겨 온 윌리스 아저씨가 있었다. 그가 농장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카터가의 소중한 웹스터 농장을 넘겨준다. 흑인 농장주를 있게 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던 어린 카터의 기억도 있다.
함께 어울려 자란 또래 친구들
농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지미는 자연스럽게 소작농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그들과 한 시절을 보낼 때는 흑백의 분리도, 계급의 서열도, 인간의 위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에이디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갈 때면, 기차에서 같은 칸에 앉지 못하고 극장에서도 같은 층에 앉지 못하는 등의 인종 차별 정책을 겪었지만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씩 나이가 들고 학교 생활로 백인 친구들이 더 많아진 지미는 “또래 대장이 되려고 오랫동안 애쓰던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으나, 소중한 흑인 친구들과의 대등한 감정이나 관계는 사라졌고 그들과 나는 이전과 똑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공황의 어려운 시절
대공황기를 맞는 농촌의 모습도 그려진다.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던 뉴딜정책의 폐해는 빈곤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농가의 소출을 조절하기 위해 다 자란 땅콩밭을 갈아엎으며 눈물을 흘리던 슬픈 시절이었다. “이보게, 우리 바꿔서 하세. 내가 자네 밭을 엎을 테니 자네가 내 밭을 해주게.” 차마 자신의 밭을 갈아엎을 수 없었던 어느 한 농부의 절규는 그 시절을 겪어야 했던 어린 지미의 마음에도 슬픔으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책 전편에는 그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사람과 가치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다. 소년 시절의 그의 삶 속에는 수많은 사람과 상황들이 그를 기쁘게 하거나 괴롭게 하며 지나갔다. 그 가운데서 그는 성장했다. 인생의 마감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지미 카터는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써 나간 이 과거 이야기를 통해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에 어떤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해뜨기 한 시간 전, 아직 잠에 묻힌 캄캄한 농장은 흑인 농장 감독 잭 클라크가 치는 작업 시작 종소리에 깨어난다. 자연이 깨어나고 사람들이 깨어나 하루의 노동을 시작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묵묵히 움직인다. 하루의 시작이면서 그의 인생의 시작이었던 그 시점, 땅은 삶의 원천이었다. 삶의 법칙은 혹독했지만 유일한 의지인 땅과 나날의 삶을 살기 위해 그들은 땅을 갈았다. 괴로운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그들은 땅을 믿었다. 땅은 정직했고, 지금도 정직하다. 서로 다른 인종으로 태어나서 괴로웠던 그들. 그들이 섞여서 산 시대는 사는 일이 고되고 비정했다. 편견과 독단과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과 인내로 고됨과 비정함을 이겨나갔고, 그 기록인 카터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 옮긴이 말
진정한 지도자를 기리며
올 연말에는 지미 카터의 소설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 《살아 있는 신념Living Faith》과 《힘의 원천Sources of Strength》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바 있고, 《해뜨기 전 한 시간》은 지난 2002년 퓰리처상 결선 후보에까지 오르며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변변한 회고록 하나 내지 못하는 우리네 대통령들은 끊임없이 도전하며 소설가로 발돋움하는 지미 카터를 보며 무엇을 느낄까.
언젠가 우리의 현재 노무현 대통령을 지미 카터와 비교한 기사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감’으로서는 생소한 얼굴이었지만 시대적 요구와 개인의 능력으로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카터는 “취임식 날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걸어서 돌아다녔고, 백악관에 들어서자마자 대통령 전용 요트를 팔아버리고 장관들로 구성된 대통령 자문위원회용 리무진을 없앴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청와대나 정부의 조직과 관행을 뜯어고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재임 당시의 카터는 결코 성공한 대통령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 미국 하원에서는 플레인스 아처리의 카터가家 농장을 사적지로 지정했다. 가옥을 비롯한 농장 대지는 대공황 당시 농촌 사람들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미국 내의 유일한 사적지가 될 것이다.
미국인들이 다시 카터를 기억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퇴임 이후 보여 준 지미 카터의 아름다운 업적들에 기인하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진정한 지도자를 만들고 받아들이는 미국과 미국인들이 열린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나라를 이끌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고 현실을 개탄한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위인을 탄생시키는 훌륭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