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진 소설 - 자전거 도둑
'왜 그랬던가. 그것은 바로 숱한 남정네와 정분을 뿌렸던 얼굴 반반한 춘하와 그네에게 폭 빠져들어갔던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에게 술김에 털어놓은 적도 있지만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내 입학등록금이며 그밖의 준비물 마련 등에 쓰일 이불 보따리 속의 노란 돈봉투에 떨리는 손을 댔고 그 봉투는 춘하에게 흘러갔다는 사실을 난 등록기간 마감 날에서야 알 수 있었다. 아주 우연하게, 더 깊은 속사정을 밝힐 수도 있지만 이 정도 사실만으로도 알 만한 사람은 아버지와 춘하 사이가 한때 그렇고 그런 사이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난 한동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겉으로는 평상적 감정을 회복한 듯했지만 그건 정말 겉가죽에 불과했던 것이고 감정의 심연에서는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와 그 나이답지 않은 허무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정말 아주 우습기 짝이 없는 대상이 돼버렸다. 아들의 중학교 등록금을 빼돌려 정분이 난 여인의 단속곳 속으로 밀어넣어준 사내를 난 애비로서 승복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아버지를 '아버지' 이외의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이 비정상적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본문 '아버지의 자리' 중에서
김소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상처들은 당시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것은 거듭 통증을 수반하는 상처로 남으면서 통증을 넘어선 영광의 상처로도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월의 힘, 인간의 힘이다. 김소진의 작품들에서는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태도가 짙게 깔려 있다. 70년대의 가난의 기억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며, 이를 기억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을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70년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바꾸어 놓는다.
- 김만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