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그 자리
세상에 대한 '빚'을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 민재의 짧은 여정을 중심으로 청년 지식인의 고뇌와 혼돈을 그린 이 작품에는 습작기 작품 특유의 거친 표현과 엉성한 짜임새, 채 걸러지지 않은 생경한 관념이 엿보이지만, 현실과 맞서겠다는 절대의 부정의식과 그것을 이끄는 젊고 순수한 열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중편 '미귀(未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내몰린 주변인으로서의 전향 장기수와, 그 사방으로 막힌 절망의 현실을 주목한다. 북조선에서 철도부 공안원으로 있던 '그'는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붙잡힌다. 폭력과 고문으로 점철된 '전향 공작' 앞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향 아니면 죽음밖에 없다.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전향 테러에 못 이겨 결국 전향서를 제출한 그는 이십 년을 채우고 전향수로 출소한다. 시골농장 농꾼, 신문보급소 총무, 중고서점 점원, 아파트 경비원을 거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취로사업밖에 없다. 그나마 세상사리에 어두워 상처를 입고, 끊임없는 감시의 눈 앞에서 무력한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