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이 ‘아래’와 ‘위’로 나누어져 있다는 믿음,
호칭을 바꾸면 가족의 위계가 무너질 거라는 허상.
우리는 과연 평등한 개인으로 만나고 있을까?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는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의 차별적인 가족 호칭을 바꾸려고 싸워온 저자의 자전적 기록이다. 시가에서 ‘아주버님’, ‘도련님’, ‘형님’ 등의 호칭을 바꿔보려 말을 꺼내자마자 저자는 곧바로 ‘가족 서열’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서로를 행복하게 부를 수 있도록 평등한 가족 호칭을 찾아보자는 제안은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를 통해 저자는 가족 서열과 나이 서열이 가부장제와 긴밀하게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가족 호칭 투쟁기를 한국여성민우회 독서 모임 회원과 공유하면서 응원을 얻고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더는 가족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인식에 가족이라는 담장 밖으로 나가 가족 호칭이라는 계단을 부수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남편 형으로부터 들은 모욕적인 폭언 중 가장 가슴 아팠던 두 문장을 100개의 컵에 새기고, 컵 아래쪽에는 ‘Men Talk’라는 글자를 새긴 뒤, 그간의 호칭 투쟁 기록을 편지로 써서 100개의 컵 박스 안에 담고 광장으로 나섰다.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공감했다. 저자는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오랫동안 자신 안에 머물던 한 가지 생각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 누구도 듣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 이후 저자는 자신의 호칭 개선 투쟁기를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에 4회에 걸쳐 연재하는데, 이 글이 오마이뉴스에 노출되면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질타를 받게 된다. 댓글 창에는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가족 호칭 개선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들끓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호칭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을 자신이 속한 가족 집단을 해체시키고 파괴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이 책은 한국여성민우회에 연재했던 글을 바탕으로, 더욱 자세한 가족 호칭 투쟁의 기록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았다. 서사의 속도감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촘촘하고 세밀한 묘사는 스토리의 흡입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이 책은 여전히 우리 내면에 깊게 박힌 가부장의 질서를 언어라는 차원에서 숙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