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의 공부론》은 오랫동안 학문공동체 ‘장미와 주판(1992~2009)’을 중심으로 삶(사람)의 무늬를 탐색하는 공부로서의 인문학적 실천을 수행해 온 저자(김영민)가 인문학 공부의 이치를 살핀 책이다. ‘인문학 공부의 이치[人紋]’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자는 중국 고전 《문심조룡》에서 전설적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현대 이소룡의 궁푸(쿵후)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삶이나 고전 속에서 톺아본 27가지의 참신한 공부론을 펼치며 인문학 공부의 이치를 살핀다. 하나하나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인이불발(引而不發)’, 즉 ‘쏘기 전에는 영영 알 수 없는 것이며 쏜 후에는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란 공부의 이치에 절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인물의 삶과 글 속에서 살펴보는 사람무늬人紋, 공부의 이치
…… 이소룡, 이종범, 차범근, 미야모토 무사시 등
이 책에는 철학자들을 비롯해 이소룡, 이종범, 차범근, 미야모토 무사시 등의 유명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인물의 삶과 글이야말로, 사람무늬[人紋]를 잘 드러내주고, 이로써 인문학 공부의 이치를 살피는 밑절미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전하는 공부론은 참신하다. 예를 들어, 이소룡의 궁푸를 통해 공부하는 자는 무릇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할 것”을 지적하며, 스타일이란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고 자신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고 권면(勸勉)한다. 야구선수 이종범에게서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할 수 있는 학인의 자세를 배우라 하고, 차범근이 활약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적지(敵地)에서 온몸으로 뛰고 부딪치며 이룬 그의 정직한 성취”를 공부하는 자의 자세로서 맥을 이어간다. 또한 문사(文士)들의 허영과 무책임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되는 무사(武士)의 실전(즉, 한 번의 실수가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으로 임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미야모토 무사시이다. 그의 《오륜서》를 인용하며,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흘리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하는 세태를 지적하며, “무기와 몸의 구별조차 없는 두루뭉술한 관념적 혼란과 혼동으로는 공부의 기본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좋은 글과 말일수록 한 문장 한 문장씩 자못 고통스럽게 읽/듣는 ‘비용’은 필수적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에 수록된 글의 일부는 <한겨레신문> 연재 중에 ‘신문 독자가 어려워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중도하차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학인들에게 쉽게 쓰고 평이하게 말하는 일을 외려 경계하라고 말한다. “‘쉬운 글’에 묻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려는 자는 곧 소비자이며, 배우는 자는 소비가 아닌 것으로 이 시대의 화두를 삼으라”고 권면한다. 이 책에는 여러 철학자들의 말이 인용된다. 그리고 낯선 철학 개념어와 생경한 한글어가 가득하다. 하지만 각 장마다 드러나는 공부론의 주제는 명료하여 단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며 ‘무릇 공부는 근기’이고, ‘앎과 삶을 일치’시켜야 하고, ‘실답게 오가는 대화가 곧 공부’이며, ‘공부는 시간의 딸’이며,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고, ‘공부를 일상화할 수 있는 몸을 가져야 하’는 것 등이다.) 이처럼 저자가 풀어내는 공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장마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가는 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이는 저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공부론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철학과 인문학 텍스트는 사용설명서나 리모컨만 달랑 달고 나오는 제품이 아니므로, 좋을 글과 말일수록 한 문장 한 문장씩 자못 고통스럽게 읽/듣는 ‘비용’은 필수적이다.”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인이불발(引而不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활을 당기되 쏘지 않는 일은 마치 ‘알면서도 모른 체하기’처럼 그저 알기도 아니며 그냥 모르기도 아닌 것이다. “‘이백은 술 한 말에 시를 백 편 지었다’고 하지만, 실상 그 시(詩)들은 지어지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웠을 테다. ‘달빛과 더불어 옥수수도 익는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격언도 있다. 태양빛에 옥수수가 익는 것이 우리의 상식일진데 ‘달빛 아래 익는 옥수수’를 떠올리는 인디언의 상상 속에 어떤 이치가 숨어 있을까? ‘김치는 손맛’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의 뜻을 단박 알아챈다. 그러나 정작 김치의 맛은 바로 그 손이 김치를 잊고 있는 동안에 숙성한다. 다시 말하면, 김치를 담근 그 손길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면서 모른 체하는’ 사이, 김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익명의 무의식(=김치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공부론의 요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