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서 빠져나온 여자
표제작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는 벼락을 맞고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갖게 된 후 4년간 세상 각지를 돌아다니며 볼 것, 못 볼 것을 두루 구경한 한 남자가 우연기 길거리에서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남자는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로부터 벽을 통과하는 초능력에는 시한이 있다는말을 듣게 된다. 시한이 다해서 세종문화회관 벽 속에 갇힌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던 남자는 벽에 갇힌 남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결국 세종문화회관 벽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의 자만심이란 도무지 어떤 벽도 무서워할 줄 모르는 무지막지한 것'이라는,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의 중얼거림이 풍자적인 울림을 전해준다.
현실을 비틀고 뒤집어 낯설게 하기
각각 조금씩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홉 편의 단편들 모두 원재길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거침없고 천진한 상상력이 낳은 낯설고 묘한 인간 풍경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실을 다루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비틀고 뒤집어 낯설게 만드는 데 능하다. 그리하여 작가 득의의 낯설게 하기 방법은 상투적인 인식을 뒤집으며 인간 진실에 더께진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 인간 군상이 겪는 문제들을 좀더 풍부한 질감과 생동감을 동반해 드러내기 위한 수단'의 모색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이야기는,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혹은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의 소설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알레고리다. 그는 이 알레고리로써, 현실이라고 하는 중력권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수많은 우리 소설가들이 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쓰고 있는 이 시대에 원재길이 드디어 벽을 만나고 있다는 데, 벽 앞에서 뚫고 지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데 축하를 보낸다. -이윤기(소설가)
원재길은 독특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독자의 기대 지평을 의뭉스럽게 배반하며 전혀 의외의 지점으로 상상력의 물꼬를 터간다. 그의 자유자재는 소설의 낯익은 관습에 일쑤 단지를 걸며 일상 이면의 낯선 얼굴을 문득, 서늘하게 부조해버린다.
그 부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욕망이나 마성의 섬뜩한 그림자이기도 하지만 보다는 즐겁게 숨쉬고픈 인간의 오랜 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야기꾼의 가벼운 행장은 독자를 억압하지 않거니와, 그와의 동행이 즐겁고 기꺼운 이유다. -정호웅(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