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이 된 것들
뉴타운 백화점과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이쪽과 오래된 서민 아파트와 무엇이 자고 자라는지 알 수 없는 농지, 뒤숭숭한 소문만 돌던 놀이터가 있던 저쪽. 그 두 시간의 경계가 되어있는 ‘다리’. 그리고 그 다리에서 마음이 뒤집힌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부도로 수연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소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역시 ‘다리 건너에 사는 아이’로 분류된다. 또 다른 ‘다리 건너에 사는 아이’인 은희는 수연과 친구가 되고, 함께 집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며 서울에 가는 것을 꿈꾼다. 어느 날, 수연은 옆 동에 사는 은희의 방 창문에 비춘 그림자를 통해, 은희의 아버지가 그녀를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수연의 어머니는 그러한 환경에 놓인 은희를 불쌍하게 여기나, 동시에 ‘불행은 감기처럼 전염되기 쉬운 것’이라며 은희와의 관계에서 수연을 보호한다.
신유진은 자신의 산문집 [열다섯 번의 밤]에서 불행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다.
“슬픔을 나누는 것과 불행을 나누는 것은 다르다. 슬픔은 위로를 원하지만, 불행은 불행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행한 상태, 그 자체를 가장 좋아하며 변화를 싫어하고 매우 친화적이어서 어떻게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모두를 끌어당기려 한다.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란 놈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를 막고 달아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듯이 귀를 막고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럴 수 있을까. 불행을 버리고 가면, 불행과 함께 남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불행을 버리고 사람을 끌어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런 기술을 배우고 싶다. 사람의 말과 불행의 말을 구분하는 법, 사람의 마음과 불행의 마음을 알아보는 법, 그것을 안다면 예의 없이 손을 내미는 불행에게 완벽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한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불행에 빠져 죽지 않고 사람만을 건져오는 법,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절실하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슬픔과 불행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그 둘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지가 않아 자꾸만 눈을 감게 된다.”
“보이니까, 눈을 감았는데도 보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는 늘 다리 위에 있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더 풍요로운 쪽으로 고개를 향하며 열심히 발을 옮긴다. 이것은 욕심이나 욕망이기보단 생존에 가까운 일. 그러나 등 뒤의 어떤 것들이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다리 저편에 두고 온 것과 또는 붙잡을 것 없어 다리 위에서 떨어진 것들, 어쩌면 우리가 쉽게 놓아버린 것들, 불행이 아니라 슬픔이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시대의 흔적처럼, 누군가의 팔뚝에, 얼굴에, 손바닥에 얼룩으로 새겨진다. 눈을 감았는데도 보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아니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잔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