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멸종을 기다리는 병든 짐승들처럼
스스로를 버릴 일 하나만으로 떠난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여행
『여행의 기술』은 우리 시대의 절실한 고통 하나를 응시한 작품이다. 지방의 한 대학의 비정년트랙 교수인 승호는 소위 ‘먹물’이자 연봉 이천사백만 원짜리의 ‘무늬만 교수’이고 그마저도 해임될 위기에 처한 학벌 사회의 ‘잉여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가난뱅이인 데다, 종말론에 미친 남편을 둔 불쌍한 누이가 유일한 피붙이이다.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은 자폐아이고, 생활고에 지친 아내는 집을 나간 지 2년이 되었다. 이 소설은 보통의 소설이 금기로 삼는 우연과 극단적 설정을 전면화함으로써, 사회나 현실보다는 주인공 승호라는 인간에게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승호의 모습을 통해 『여행의 기술』은 단순한 리얼리즘 소설이 아닌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승호는 아들 겸이와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 길은 곧 자신의 지난 삶을 다시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7번 국도는 다시 말하면 승호에겐 과거의 기억을 화석처럼 간직한 상징적인 곳이다. 속초에서는 아버지를 묻었고, 강릉에서는 어머니를 묻었다. 7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바로 승호의 인생을, 그 아프고 고단했던 시절의 뼈마디를 더듬어가는 행로인 것이다. 7번 국도 어디를 가더라도 상처의 압점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살았던 흔적은 모두 부서졌지만 상처는 고스란히 유적처럼 남아서 승호를 괴롭힌다.
7번 국도를 따라 승호의 여행기를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술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승호는 여행이란 형식을 빌려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여행의 방식을 통해 삶을 겨우 유지해나가는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의 기술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목차
승호는 아들 겸이를 데리고 7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다시 찾은 속초에서 승호는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승호의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난 후 삽팔선을 넘어 속초에 정착했고 남한 여자를 만나 승호와 누나를 낳는다. 행복하게 사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결국 내연녀의 남편의 칼에 맞아 죽고 어머니는 속초를 떠나 강릉에서 포목점을 차린다. 승호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얼마 후 중앙시장에 큰불이 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대신 살림을 도맡아 하던 누나는 승호에게 엄마면서 성모 같은 존재였지만 이어진 누나의 결혼 생활 또한 불행하다. 아이를 못 낳는 누나는 시어머니의 갖은 구박을 견디며 살아간다. 남편은 휴거론에 심취해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재림을 기다리다 결국 집을 나간다. 시어머니는 뇌일혈로 쓰러져 누나가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병수발을 들지만 결국 남편이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누나는 시댁에서 쫓겨난다.
한편 승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겸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그러나 겸이는 유아기의 열성경련으로 간질을 앓고 있으며 지능이 모자라는 자폐아이다. 겸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병원에서 언어클리닉으로 놀이교실로 심리치료실로 수영장으로 다니는 아내의 희생과 노력덕분에 그나마 간단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학교생활은 하지 못하는 아픈 아이이다. 소설가의 꿈을 이룬 승호는 어렵게 지방대학교수가 되지만 실상은 연봉 이천사백만 원의 무늬만 교수직으로 생활은 지옥처럼 암담하기만 하다. 아내는 원망과 짜증으로 승호를 원수 대하듯 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날들을 견디던 승호는 고교시절 문학동아릴 통해 만났던 첫사랑 송희를 다시 만나 고달픈 일상의 탈출구로 삼게 된다. 승호의 수입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아내는 카드 돌려막기로 신용불량자가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이 넘어가자 아내는 승호와 겸이를 두고 급기야 집을 나간다. 혼자서 직장을 다니며 겸이를 돌보던 승호는 학과가 없어져 해임을 당하고 막막한 현실 앞에서 승호는 결국 죽음을 결심하고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