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새로운 번역, 반드시 읽어야 할 미스터리 마니아 필독서!
“여기에 행복이 있다.”
평화로운 가을날, 한 남자는 신주쿠 중앙 공원에서 한가로이 위스키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갑자기 폭음이 울리고 폭발이 발생해 사상자가 대거 나오게 된다. 이를 계기로 남자의 일상은 무너지고 만다. 그는 신주쿠 골목 술집의 평범한 바텐더 시마무라로, 폭발 현장에 위스키 병을 두고 나오면서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건 피해자 중에는 한때 남자와 함께 학생 운동을 했던 친구 두 명이 있다. 이토록 지나친 우연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사건으로 평화로운 일상을 완전히 박탈당한 남자는 이러한 의문을 품은 채 사건의 진상을 쫓기 시작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시마무라와 함께 학생 운동을 했던 다른 두 명의 친구(유코, 구와노)와 야쿠자, 유코의 딸, 노숙자 등 각각 개성을 뽐내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먼저 대학투쟁을 함께했던 삼인방인 시마무라, 구와노, 요코는 각기 자기만의 뚜렷한 개성을 발산한다. 치열한 대치 상태에서도 천하태평인 시마무라, 날카롭고 예리한 두뇌의 소유자 구와노, 용감하면서도 절제력 있는 요코가 그러하다. 이들은 중년이 되어서도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은 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간다. 늘 천하태평이었던 시마무라는 시시한 바텐더가 되고 능력자 구와노는 한 회사의 대표가 되고 요코는 뉴욕에서 커리어우먼이 된 것이다. 삼인방 외에도 뼛속까지는 야쿠자가 되지 못한 아 사이와 지나치게 당돌한 도코도 나름의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후지와라 이오리에 관한 대담에서는 이 등장인물들이 전부 엘리트라는 점에 주목한다. 찬찬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 바보 같은 인물은 없다. 유코와 도코에게 나사가 빠져 있다고 늘 비난당하는 주인공마저 현명하지 않은가. 대담자들은 작가 자신부터 일단 머리가 좋은 엘리트라서 등장인물들도 다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한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요소는 이러한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감정선이다. 60년대 전공투가 좌절된 뒤, 이들이 한때 추구했던 이상, 실천했던 연대는 실패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 유능한 구와노 역시 현실의 장벽 앞에서 허무와 체념에 휩싸여 결국 지치고 만다. 늘 천하태평한 시마무라는 줏대 없이 그런 구와노와 또 똑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그 후 오히려 시마무라는 잿빛 현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타개해간다. 복싱을 하면서 일상을 견디고 극복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구와노는 기쿠치의 이러한 면에 놀라면서 질투하고 기쿠치의 건강한 면모를 알아본 유코가 있다.이들 간의 섬세하지만 뒤틀린 애증과 우정, 질투와 동경이 한데 얽히는 지점이다. 서투르지만 빛나던 청춘을, 중년이 된 이들이 각자 소화해내는 과정을 들여다보며 그 시절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도 흥미를 돋우는 요소이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작품 전반에 진한 향을 내뿜고 있는 위스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군침 도는 핫도그 장면은 이미 현지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을 정도다. 위스키와 핫도그의 풍미를 음미하며 작품을 한층 더 즐겁게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하드보일드계의 결정판!
“사람을 살해할 때도 이렇게 하는 건가,
테러리스트. 푸른 파라솔을 빙글빙글 돌리네.”
19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후지와라 도시카즈(藤原利一). 그는 도쿄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電通)에 입사했다. 그러다 1985년 『닥스훈트의 워프』로 제9회 스바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95년에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한 목적으로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을 투고하게 된다. 60년대 안보투쟁 세대의 상처와 상실감을 사실적으로 녹여낸 이 작품으로 후지와라 이오리는 1995년 제41회 에도가와 란포상과 1996년 제114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게 되었다. 에도가와 란포상과 나오키상의 동시 수상은 사상 최초였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이목을 끌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더군다나 란포상에서는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수상이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로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위를 기록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6위를 기록하며 명성을 떨쳤다.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은 인기에 힘입어 1996년 TV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2015년 『도덕의 시간』으로 제6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오승호(고 가쓰히로) 작가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소설로 후지와라 이오리의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을 꼽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오승호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좌절에 대한 동경을 느꼈다고 한다. 좌절은 싸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후대 작가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던 후지와라 이오리는 2007년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기회가 이제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생전 발표했던 작품(『닥스훈트의 워프』『시리우스의 길』『손바닥의 어둠』『다나에』『오르 골』 등) 중에서도 가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세계에 입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