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배
세상의 모든 바보들에 대한 원전 《바보배》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대양을 떠돌면서 자기들의 사업을 벌였다.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바다 깊이 가라앉았다. 그들의 영혼은 재앙을 입고 토막이 났다. 사람들은 술취한 사람처럼 얼이 빠져서 비틀거렸다. 사람들의 지혜는 간곳이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보배》가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일찍이 2006년에 출간된 이력이 있는 《바보배》는 인문 및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관심을 받고 있으며 중고 거래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으로 유명했다. 《바보배》는 바보들을 가득 태운 배가 어리석음의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지나 바보들의 유토피아인 ‘나라고니아’로 향하다 난파한다는 이야기로 총 110여 가지가 넘는 바보들의 유형이 목판화 그림 한 점씩과 짝을 이뤄 병렬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이 판화들은 알브레히트 뒤러가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보들의 혁명,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바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과의 대척점에서, 인간의 무지와 죄악 어리석음을 되비추는 알레고리로 자주 쓰였다. 브란트는 궁성과 도회 골목, 농촌, 교회 등 삶의 현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바보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등 수많은 신화와 고전, 성서 등을 방대하게 인용해 작품 곳곳에 배치한다. 《바보배》는 출간된 첫해에만 3쇄를 찍고, 브란트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17판을 찍으며 르네상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묘사와 냉철한 풍자와 사회 비판 정신을 담은 《바보배》는 훗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바보배》 출간 3년 뒤, 야콥 로허는 스승의 작품인 《바보배》를 라틴어로 번역한다. 이후 《바보배》는 유럽 전 지역으로 번역되어 퍼졌으며, 그 즉시 유럽 인문학자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 후 ‘바보’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의 상징적 키워드로 부상해 동시대와 후대 인문주의적 글쓰기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가 브란트의 《바보배》를 사표로 삼아 《바보예찬》을 집필했으며, 토마스 무르너의 《사기꾼조합》,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브란트의 《바보배》에서 바보들의 유형을 빌려왔다.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광인들의 배>와 피테르 브뤼헐의 그림 <네덜란드 속담>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바보들 또한 그란트의 《바보배》에 등장하는 바보들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리고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광기의 역사》를 집필하며 영향을 받은 책으로 《바보배》를 꼽는다.
우리가 탄 이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바보배》에 등장하는 숱한 바보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읽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500년 전 고전 속 현실과 오늘 우리의 현실이 정확히 일치하다는 것을. 이 책에 등장하는 바보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생생히 존재한다. 광기와 비이성의 세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만, 어리석고 무능한 선장이 키를 잡고 있으면 배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천태만상 바보들이 / 권력을 믿고 까부네. / 권력이란 마르고 닳도록 지속하는 줄 알지만 / 봄볕에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네. _‘권력의 종말을 모르는 바보’ 중
그렇다면 과연 나는 정말 이들과 다른가? 세상의 모든 바보들과 함께 제바스티안 브란트도 결국 바보배에 승선한다. 바보배 판화 뱃머리에 바보깃발을 붙들고 있는 박식한 바보가 바로 브란트이다. 브란트는 독자들이 책 속에 담긴 숱한 바보들의 모습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 지혜의 한 조각은 아마 이 수많은 ‘바보’들 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자만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