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아도
소리를 잃은 리에, 필담(筆談)으로
도쿄 No. 1 호스티스가 되다!
듣지 못하는 당신을 불러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청각장애자 수는 24만 5801명으로 전체 장애인 중 3위에 육박할 정도로 그 수가 많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자주 눈에 띄지 않는다.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의 사회적 고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극장에서 국산영화를 볼 수 없다는 취미의 불편함은 차치하고라도, 수화라는 한정적인 의사소통 방법은 직업의 세계마저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때문에 청각장애자들의 대부분은 타인과의 의견 교환이 잦은 전문직이 아니라, 단순 노무직에 많이 치우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청각장애를 가진 호스티스가 생겨 화제다. 호스티스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전형적인 손님 상대 업무 즉, 접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호스티스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수화에 능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이 호스티스는 필담(筆談)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 필담
『들리지 않아도』는 필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28세의 청각장애인 사토 리에의 자전적 에세이다. 22개월 만에 청력을 상실한 사고, 남 다른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유년시절, 세상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찼던 청소년기,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던 차에 호스티스로 입문,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직장을 만들고 싶은 미래의 꿈까지 시종 차분한 문체로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적인 장애인 성공 스토리와는 방향을 달리한다. 매일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클럽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저자는 짧지만 강한 필담으로 위로한다.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S 씨는 메모장에 「신(辛)」이라는 한마디를 적고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리에는 어떻게든 힘이 돼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랜 생각 끝에 펜을 들었다. 「행(幸).」 괴로울 신(辛) 자 위에 줄 하나만 더 그으면 행복할 행(幸) 자로 바뀐다. ‘지금의 힘든 상황은 행복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뜻이다. ‘행복’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S 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해지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괴로움은 행복으로 가는 도중> 중) 낮 동안 술책과 아부, 온갖 정치적 상황으로 피곤했던 일본의 큰손들에게 저자의 담담한 필담은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호응은 저자를 단숨에 도쿄 긴자의 No.1 호스티스로 만들어준다.
저자의 이야기는 2009년 일본 TBS에서 <필담 호스티스>라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동명의 책 역시 출간되자마자 100만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일본의 비즈니스맨들에게는 저자의 접대 방식을 배우자는 붐이 일기까지 했다. 또한 장애인이면서도 비장애인을 위로하고, 치열한 긴자의 세계에서 당당한 1위가 된 저자의 이야기는 실의에 빠진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신에게 귀를 빼앗긴 아이
생후 22개월 때 목욕을 하던 리에는 잠시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집니다. 그로부터 며칠간 사경을 헤매고 수막염(髓膜炎)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수막염이란 뇌와 척수를 둘러싸고 있는 세 층의 막에 염증이 생겨, 발열과 두통, 의식불명을 일으키는 병입니다. 이 사고로 리에의 가족은 두 가지를 잃었습니다. 리에는 병의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었고, 리에의 어머니는 리에를 아프게 했다는 죄의식으로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그 후 리에는 어머니의 엄한 훈육 아래 자라게 되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지 못했던 리에에게 소리 없는 세계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부모님과 오빠의 보살핌을 받으며 구김살 없는 아이로 성장했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부터 ‘왜 나는 남과 다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다니던 보육원에는 낮잠 시간이 있었어요. 한낮에 친구들과 벌렁 드러누워 자는 그 시간이 어찌나 달콤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낮잠 시간이 끝나도 아무도 저를 깨워주지 않는 점이 좀 이상했어요. 눈을 떠보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나만 계속 누워 있던 것인지……. 선생님은, 그리고 친구들은 왜 나를 깨우지 않았던 것일까요?”
배려인지 차별인지 모호한 ‘다른 대우’는 리에의 마음에 커다란 물음표를 남겨놓았습니다. 너무 어려 차마 이해할 수 없던 자신과 남의 차이를 채 알기도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리에에게 엄청난 폭언이 쏟아집니다.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들리는 교실’ 수업을 진행하던 A 선생님은 평소에도 다혈질적 면모로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꺼려하는 괴팍한 분이었습니다. 리에는 질문조차 받아주지 않는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실망해 선생님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리에의 태도가 불만이던 선생님은 칠판에다 하얀 분필로 큼직하게, 몇 번이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너는 신에게 귀를 빼앗겼다.”
이 일로 A 선생님은 리에의 인생에 있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가 됩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이름의 짓궂은 장난은, 때론 죽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다시 인연을 맺어주기도 합니다. (128쪽)
어린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봐야 할 리에에게 학교라는 집단은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강요합니다. 리에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청각장애가 다른 이들에게는 “미국인! 우주인!”(리에의 별명)처럼 보였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리에는 불편하고 슬픈 방식으로 세상과의 거리두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춘기 시절 한 손에는 술, 다른 손에는 담배에 들고 밤마을을 즐기는 문제아로 전락합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마음에 가책이 없던 리에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을 어쩌면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자주 가던 옷가게에서 도둑질까지 해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옷가게 주인은 리에를 꾸짖기는커녕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학교에 다시 착실히 나가겠다고 약속하면 방학 때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줄게.”
리에의 접객업은 이렇게 작은 옷가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꽃길이 펼쳐진 무대로
또래의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대감으로 반짝일 때, 리에는 끝없는 고민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문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클럽 마담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고향인 아오모리에서 처음으로 호스티스 일을 시작합니다. 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들고 몰려오는 클럽이라는 공간에 완전히 매료됩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소통의 방법’ 하나가 완전히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쁘게 세상을 향해 손 내밀어도 그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찾지 못해 공허하던 리에에게, 손님은 단순한 손님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글자 위로’가 일상에 지친 손님들에게 힘과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에는, 아오모리에 만족하지 않고 도쿄로,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거리인 긴자에서 No.1 호스티스를 목표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글씨로, 상냥한 마음을 담아 저분의 이야기에 보답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매일 자신의 접객 방법을 고민하고, 손님들의 성향을 분석하며 프로가 되어갑니다. 자신의 장애에 갇혀, ‘나’만을 생각했던 리에에게 ‘남’을 헤아리고 이해해야만 하는 호스티스라는 직업은, 모두와 함께 즐기는 ‘축제 같은 삶’을 안겨줍니다.
묵묵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도 적절한 순간에 던지는 지혜의 대답, 이것이 바로 리에의 접객 포인트입니다. 필담은 생각한 것을 바로 표현하는 말과 달리, 한 번 더 생각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향기롭게 익은 언어’입니다.
“손님 중에 I 씨라는 분이 계세요. 승진 때문에 아내에게 잔소리를 너무 들어서, 요즘에는 집에 가기가 싫을 정도라고 하셨죠. 그러고 보니 요즘에 클럽에 유독 자주 얼굴을 비추셨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이걸 부인에게 써서 보여주세요. 잠깐(少) 멈춘다(止). 그리고 다시 걷는다(步)고 하지 않소. 여보! 멈춰선 것이 아니고 한발 한발 앞으로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소.」
I 씨는 리에가 적어준 글귀를 편지에 써 다음 날 아침, 부인에게 건넸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가니 부인은 맛있는 음식을 가득 만들어놓고 기다렸고, 부부 사이는 전처럼 좋아졌습니다.
“부동산회사의 대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긴자에서 가장 화려한 밤을 즐기던 S 씨. 그런데 최근 그분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것이었지요.”
「신(辛).」
메모장에 그렇게 한마디를 적고 나서 잠자코 술만 벌컥벌컥 들이키는 S 씨. 리에는 어떻게든 힘이 돼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랜 생각 끝에 펜을 들었습니다.
「행(幸).」
괴로울 신(辛) 자 위에 줄 하나만 더 그으면 행복할 행(幸) 자로 바뀝니다. ‘지금의 힘든 상황은 행복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뜻입니다. ‘행복’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S 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해지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리에는 ‘사람을 향한’ 마음과 서비스를 배워 드디어 도쿄 긴자의 No. 1 호스티스가 됩니다.
모두를 위한 희망의 일터
모두가 안 된다고 말했지만 결국 최고의 호스티스가 된 리에. 그녀는 지금 또 다른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호스티스 중에 저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없지만, 클럽에 오시는 손님 중에도 귀가 들리지 않는 분 또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비단 클럽뿐이 아니라 일반인이 쉽게 가는 미용실이나 마사지숍 역시 장애인에게는 문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서비스를 편하게 받을 수 있는 에스테티크 살롱을 열고 싶어요. 직원들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일하는 곳으로요.”
리에는 이 새로운 꿈을 이룰 기반을 닦기 위해 지금도 긴자에서 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필담 호스티스’ 사토 리에.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직업의 편견까지 깨뜨린 이 조용하지만 단단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