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장례식
장례식에서 시작된 어느 화가의 삶과 그림 이야기화가의 아들인 저자는 장례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화가의 글과 그림을 소개한다. 책의 첫 장면은 화가의 임종 순간이다. 과잉되지 않은 톤으로 묘사한 죽음의 순간이 먹먹하게 다가올 때쯤, 저자는 화가가 남긴 마지막 그림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며 화가의 삶과 그림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한다. 노년에 찾아온 육체와 정신의 병으로 화가는 끝 모를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절망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화가는 그 절망의 경험을 재료 삼아 캔버스 위에 삶의 희망과 아름다움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병과 싸우며 캔버스를 채워 나갔던 화가의 모습은 삶에 지치고 낙망한 이들의 마른 가슴을 적시는 봄비 같은 위로가 된다. 저자는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제주4.3과 월남전 같은 굴곡진 현대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아버지의 삶을 조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럽게 화가의 작품과 그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장례식이 그 끝을 향해 갈 때쯤, 저자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자칫하면 형이상학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지점이지만 저자는 끝까지 이야기와 그림을 놓지 않는다. 이를 통해 누구나 언제가 한번은 맞닥뜨리게 될 삶과 죽음에 문제에 대하여 한층 더 깊은 공감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화가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듯한 체험도 선사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화가의 아들이지만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미술 사조나 기법 같은 어려운 이야기들은 찾아볼 수 없다. 평생을 화가의 가족으로 살아왔기에 저자는 삶과 예술은 결코 서로를 분리한 채 존재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화가의 장례식』이 그동안의 미술 서적들과는 다른 독특함을 유지하면서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평생 온몸으로 보고 듣고 느껴온 예술가 아버지의 삶과 그림을 한 권의 책에 진심을 다해 꾹꾹 눌러 담았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신선한 예술적 경험과 울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