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그 위대한 쪼존남 이야기
'白手’가 아니라 ‘白首’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백수’를 본업(本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백수’가 무엇인가?
남들 열심히 일할 때 게으르게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며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인간군(群)을 일컬어온 단어가 아니던가. 그래서 햇빛에 검게 그을린 손에 비해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아 희고 고운 손을 가진 그런 자들을 사람들은 한심하고 딱한 눈길로 바라보며 올바른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백수예찬론자인 그는 이 책을 통해 백수가‘흰 손’을 뜻하는 ‘白手’가 아니라고 딴지를 건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 시대의 절대적 필요성에 의해 불가피하게 파생된 계급집단,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직장을 양보함으로써 국가 경제발전에 고귀한 봉사를 하고 있는 백수가 '白首’이지, 어찌 머리 아랫부분의 ‘白手’를 지칭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남아도는 것이라고는 오직 시간뿐인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으로 다음과 같은 백수의 어원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때는 조선 중종 시절, 파벌싸움으로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한 무절제한 과거선발로 인하 여 지방에는 과거에 급제하고도 발령을 받지 못하고 지방에서 놀고 먹는 한량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발령을 기다리며 책이나 읽고 소일을 하며 준양반다운 행동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은 사라지고 그렇다고 육체적인 노동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방탕스런 생활을 하면서 일반 서민들에게 좋지 않은 짓을 하니, 양반가에서도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지방 한량들은 점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였으니, 당시 조선시대에는 이런 백수들의 문제가 큰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돌아다녔는데, 이것이 바로 ‘白首’의 어원이다.
결국 그의 백수론의 요지는 이러하다. 모든 노동은 육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노동하지 않는 백수는 그만큼 육체의 활용빈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노동과 여가가 뚜렷이 분리된 세계에서 노동은 곧 주체성의 상실을 뜻한다. 즉 노동하는 육체는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본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여가를 통해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자기 육체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가르침을 통해 물 흐르듯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라고 설파한 저 현존했던 가장 위대한 백수노자(老子)의 존함만 들어도 머리를 조아리며, 백수가(歌)를 지어 “누가 백수를 무직이라 했는가. 백수야말로 귀하고 귀한 젊음의 직업이니, 보라, 그대 이름은 백수, 백수는 프로보다 아름답다”고 읊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백수(?) 이외수님을 자기 혼자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
쪼존남과 뻔뻔남을 자처하는 백수의 꿈
물론 1차 백수시절엔 그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수 경력에선 그보다 한 수 위인 친구로부터 그 많은 백수 아지트며 백수로서 지키고 행해야 할 모든 행동수칙 등을 완벽히 전수받은 그는 곧 어머니의 따가운 잔소리도 슬쩍 한 귀로 흘려듣고 슬리퍼짝에 반바지 차림으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녀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었으며, 백주대낮에 동네에서 어머니 친구분을 만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조카녀석을 포대기에 업고 다녀도 낯뜨거운 줄 모르는 뻔뻔남이 되었다. 그뿐인가? 결혼 후엔 와이프와 함께 지하철을 타도 애기 분유가방을 옆에 끼고 자신이 직접 우유를 먹이면서 자기 품에 딸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참으로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부끄럼없이 보여준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 타다 줄 때는 그의 숙면을 위해 와이프가 애를 데리고 잤건만, 백수가 된 후에는 그가 애를 데리고 잔다. 어디 그뿐인가? 헌혈을 하고 싶어도섬세한 외모를 가진 ‘백수 같아 보이는 인간’에겐 헌혈조차 권하지 않는 사회에 그는 불공평함을 느끼는 한편, 주변 사람, 특히 와이프의 칭찬을 들으면 하루 종일 날아갈 듯 기쁜 몽환의 상태에 빠지는 이상성격이 되고 만다. 또 취업활동을 위해 인터넷이 설치된 친구 사무실을 들락거리다가 친구에게마저 냉대를 받고는 설움을 삼키고, 평소 벤치에 앉아 담배라도 피우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가가 농담도 잘하면서 유독 그에게만은 친근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조차 야속함을 느끼고 남몰래 복수의 칼을 가는 쪼존남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실 그가 회사에서 짤린 후(본인은 극구 제발로 걸어나왔다고 하지만) 이토록 행복한 백수생활을 가슴 아리게 반납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 애를 써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한때는 거의 날마다 인터넷으로, 전화로, 우편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봤다. 하지만 그 전화요금 하며 등기료가 한푼이 아까운 그의 목을 죄어오는데다 ‘씰데없는 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자’는 그의 인생 목표에도 어긋나기에 포기하고 그 후로는 1주일에 하루만 취업활동을 하기로 정했다. 1주일에 하루만 취업활동을 하는 더 큰 이유는, 매일 원서를 내고 또 확인하기 위해 그 회사에 전화를 하면 담당자들의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백수 사고방식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눈을 낮춰 보라는 말을 듣고는 연봉 1200에도 지원해 보고, 학력을 속여보기도 했다. 또 오죽 답답한 날은 학력은 박사, 연봉 4000 이상에도 지원해 봤다. 이러나 저러나 언제나 서류전형도 통과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 그래도 천상 백수 체질인 그는 늘 “쳇,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 정말 맘먹고 취업활동하면, 까짓것 언제든지 회사에 들어갈 수 있고말고”하고 꿋꿋함과 의연함을 절대로 잃는 법이 없다.
하지만 오늘도 그는 백수탈출을 꿈꾼다
아무튼 그는 지금 이렇게 편하고 행복한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기쁘다. 백수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저런 어려움쯤이야 직장생활하면서 겪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 동안 직장생활이란 걸 조금밖에 못해서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만, 다행히 부모님이 결혼할 때 전세를 얻어주고, 가끔 카드도 막아주고, 또 아주 가끔 생활비도 주셔서 ‘생존’에는 지장이 없다. 그런데 돈 문제보다 더 백수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게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이다. 그의 부모님은 일찍이 고향을 떠나 물 설고 낯선 서울땅에서 어렵게 자수성가하신 분들이시다. 그런 부모님이 애면글면하며 남들 시키는 공부 다 시켜놓았건만, 정말 주변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이런 비참하고 비상식적이고 짐승 같은 짓을 하며 백수예찬론입네 뭐네 하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자신의 꼬락서니를 돌아볼 때면 참 한심하고민망하기가 그지 없다. 그런 날이면 그는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아버지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때가 철이 들기 시작하는 때’라고 하는데, 자신은 아직 아버지 뒷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안 보려 한다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