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저자
아지즈 네신
출판사
푸른숲
출판일
2009-01-16
등록일
2009-07-21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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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터키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Aziz Nesin. 1915-1995)이 자신의 유배 생활을 바탕삼은 소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포복절도할 웃음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존재의 깊은 슬픔을 만나게 되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탈리아,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었다. 특별히 자신의 체험이 절절히 녹아 있는 이 작품은 부끄럽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아지즈 네신의 진면목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가 인쇄소를 급습한 경찰에 체포되어 유배 생활을 시작한 네신은 소도시 부르사에서 소심하고 비굴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격동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은 더욱 깊고 절절하다.


풍자 문학의 거장,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터키 최고의 작가

터키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1915-1995)은 터키의 대표 지성知性이자, 터키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다. 시, 소설, 희곡, 평론, 칼럼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백여 편에 이르는 작품은 탄탄한 서사와 날카로운 풍자로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터키인 중에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완전히 아지즈 네신의 소설이군”이라는 관용어가 있을 정도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은 에세이집 《다른 색들》에서 아지즈 네신에 대해 “이처럼 대중적인 필치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꿰뚫어본 작가는 전 세계 문학계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지즈 네신 문학의 성공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극찬했다. 뛰어난 입담과 흡입력 강한 서사로 구비문학적 성격이 강한 터키 문학의 정점에 있는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도 문학성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와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수여하는 황금종려상, 황금고슴도치상과 같은 풍자 문학상을 두루 수상하였다.

이야기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는 작가
국내에 출간된 아지즈 네신의 작품으로는 《생사불명 야샤르》,《제이넵의 비밀 편지》,《당나귀는 당나귀답게》《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개가 남긴 한 마디》가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적 특징은, 문학의 본령인 이야기성이 뛰어나며 동시에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날카롭다는 점이다. 정치 상황이나 사회 시스템이 우리와 비슷한 터키가 무대여서 그 비판과 풍자는 우리에게 한층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지즈 네신은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줍니다.”라는 명쾌한 말로 자신의 풍자관을 밝혔다. 그는 풍자를 통해 불의와 손잡은 권위의 알량한 알몸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자고, 우리 삶의 기반이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말하고 있다.
아지즈 네신은 작품 속에서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다루면서 각 계층의 언어, 행동양식, 세계관, 감정, 사고를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그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모순, 현학적인 자기만족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특히 성숙한 자기비판적인 시선으로 사회 시스템-정치구조, 생계수단, 남녀의 권력 구조, 도시 이주민 문제 등-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삶까지 전방위적으로 문제 삼는다.

미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희망을 심어준 실천적 지식인
아지즈 네신이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작가 이전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기득권 세력과 투쟁하는 데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터키의 폭력적인 정권, 특히 언론인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탄압을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들로, 내란선동이나 좌익활동 죄목으로 250번 이상 재판을 받았으며 유배와 수감생활을 반복하였다. 1980년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 주도하에 전격적인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자 앞장서서 군사정권에 대항한 사건이나, 1990년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터키어로 출간하려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사건,? 1993년 마드막 호텔 사건(터키의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좌파적 성향을 지닌?아지즈 네신을 공격하기 위해 그가 참가한 축제 장소를 공격한 사건. 이로 인해 36명의 예술가가 죽고 24명이 중상을 입었다) 등은 그가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보호에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아지즈 네신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끝없는 관심을 쏟으며 불우아동돕기에 발 벗고 나섰다. 1972년에는 고아들에게 교육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네신 재단’을 설립했으며, 1995년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작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인세가 이 재단에 기부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던 60여 전 터키의 자화상


이 책은 작가 아지즈 네신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소도시 부르사로 유배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네신이 유배형을 선고받은 상황은 다음과 같다.〈마르코파샤〉라는 풍자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해오던 네신은 원조라는 미명하에 미국이 터키를 잠식하던 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팸플릿으로 제작하게 된다. 그가 쓴 글이 인쇄를 채 마치기도 전에 경찰이 인쇄소를 급습해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네신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찰은 형법조문을 모조리 뒤져 죄목을 붙인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출판을 통해 국가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터키 형법 제161조항. 이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이어진다. 출판 활동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이 글을 읽어야 하는데 인쇄 중인 상태로 수거된 팸플릿을 읽은 사람이 없었던 것. 인쇄소 주인 및 글을 조판한 식자공, 그리고 인쇄 기술자가 소환된다. “당신 읽었지? 분명 읽었을 거야.”라는 말이 반복되는 심문, “증인이 읽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나……”로 시작되는 판결문, 비밀리에 진행된 재판,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협박(“이 재판에 대해 한 줄이라도 쓰면 당신들은 끝장이야!”) 과정을 거쳐 아지즈 네신은 10개월 징역형과 부르사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쓴 팸플릿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았던 터키의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시 일당제인 공화인민당(CHP) 정권하에서 터키 이스탄불은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고, 정부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은 누구라도 유배지로 보내지던 상황이었다. 네신은 이를 ‘불행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절묘하게 비유하기도 하고,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터키 사회에 장티푸스나 흑사병처럼 일종의 ‘정치 병’이 널리 퍼져 있다고 꼬집기도 한다.

계엄을 선포한 정부는 그동안 별다른 재판도 없이, 죄목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 ‘사회주의자’로 몰아 아나톨리아 고원 곳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왜 유배당하는지 명확한 이유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 목덜미를 잡힌 사람은 다시 벗어나지 못했다. 이름이 당첨되면 무조건 어이 없이 당해야 하는 불행 복권과 비슷했다. (본문 119-120쪽)

터키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상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불완전한 모든 것을 개선시킬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양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빈 들판에 소나무 씨앗을 심어 숲을 조성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거짓말쟁이의 혀와 도둑의 팔을 자르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본문 140쪽)

유배지 부르사에서 만난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 군상
그렇게 해서 도착한 유배지 부르사의 생활은 첫날부터 만만치 않다. 네신을 넘겨받은 파출소의 소장들은 하나같이 그를 탁구공을 쳐내듯 다른 파출소로 보낸다. ‘책임’이란 불덩이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흡사 시트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부르사로 유배된 상황에는 무엇 때문이라고 딱히 갖다 붙일 이유가 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때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경우가 있다. 비록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억지 춘향으로라도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관공서는 단지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거다. ‘저 골치 아픈 놈을 멀리 보낼 수만 있다면 지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일단 나에게 수갑을 채워 멀리 보내기만 하면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는 셈이고, 그다음은 내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 24쪽)

저자가 유배지 부르사에서 맞닥뜨린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비굴하며, 시대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소시민들이다. ‘원칙’ 운운하면서 주인공의 돈을 가로채는 교활한 화가, 저자가 유배되어 왔다는 소식에 안면 몰수하고 사라지는 지인들, 유배된 이들을 사회주의자 취급하며 보드카를 먹이고 낄낄대는 여자, 유배된 친구를 돕는 남편과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아내 등……. 그러나 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이 껴안고 가려 하는 의지가 배어 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네신은 자신을 유배지로 보낸 당시 정권이나 세태를 비난하거나 저주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글로써 타인과 소통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_옮긴이의 말


절망스런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터키의 로베르토 베니니’

유배지의 팍팍하고 고단한 일상을 들려주면서도 네신은 상황을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한 장치를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읽는 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인물들이 겪은 현실의 아픔들에 더 진하게 공감하는 이유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저자가 어느 날 지급 보증서(우리나라의 송금환에 해당)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우체국으로 달려갔다가 맞닥뜨린 상황이라든지, 자신에게 온갖 비방을 퍼부은 신문기자가 자신을 찾아와 돈을 두고 간 뒤에 했던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저자의 처연한 상황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나는 창구에서 소포를 찾았다. 안에는 책이 세 권 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그날처럼 책이 저주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내게 쓸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본문 44-45쪽)

지금 이 글이 나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주인공은 청년이 두고 간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청년이 두고 간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았다. 십 리라. 그 돈으로 내가 맨 먼저 뭘 했냐고? 냉기 어린 방에 불을 피웠다. (본문 52쪽)

그러면서도 네신은 유배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독하고 무거운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는 다소 떠들썩한 공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비굴한 인간 군상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유쾌하고 위트 있는 풍자로 화자의 입담에 함께 울고 웃게 만드는 재능은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를 연상시킨다. 베니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코믹한 상황을 연출했고, 그런 그의 시도는 현실과 대비되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아지즈 네신 역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에서 비굴하고 어리석은 인간 군상을 따뜻한 페이소스로 감싼다. 네신이 때로는 자신을 희화화하면서까지 밀고 간 진솔한 자기 성찰로 다다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위악적으로만 보이는 인간의 조건과 현실 속에서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진심을 놓지 않는다면 그 상황 너머에 있는 인간의 진심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니었을까.

어느 날 친구가 데려가준 온천에서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한 채 빨래만 하다 쓰러지는 저자의 우스꽝스런 모습, 허기에 지쳐 유배 생활 내내 자신과 함께하던 담요를 팔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돌아오는 모습 등을 읽다 보면, “네신이 들려주는 경험담을 읽으며 연거푸 폭소를 터트리다가도, 이내 입 안에서 서걱거리는 껄끄러운 모래알들처럼 양심의 체에 걸러지는 서글픈 슬픔의 사금들을 발견”하게 된다. 슬프고 고단한 인생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라는 간결한 메시지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사람들이 젖은 빨래를 가지고 왔다. 부르사에서 딱 한 번 온천에 가보았다. 하지만 탕에 발도 못 담그고, 사자 입에서 나오는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했다. 목욕은커녕 빨래도 다 빨지 못해 젖은 채로 집으로 가지고 왔다. 뢴트겐선, 유황, 비타민 등을 중얼거리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것이다. 그래도 손수건 다섯 장은 새하얗게 빨았으니 다행이다.
손수건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유배지에서는 손수건이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을 수 있으니까. (본문 201쪽)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올라가 젖은 담요를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너무나 기뻤다. 벼룩시장을 찾지 못해 담요를 팔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팔았다면, 내게 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나갔을 것이었다. 그것은 담요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겨진 신념이나 의지,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기뻤다. (본문 80쪽)

그러나 60여 년 전 터키의 소도시에 유배된 한 지식인의 기록은 따뜻한 위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바꾸거나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 그리하여 희망이 거세된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현실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아지즈 네신이 유배 생활에서 길어 올린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마음에 담고 계속 답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정자들의 실정(失政)이나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희망을 꿈꿀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도 자신의 자리에서 행동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이상적인 감상일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해나가는 계기를 갖게 되길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_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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