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소설전집 2 - 기차, 기선, 바다, 하늘
무력감으로 휩싸인 삶의 비극성에 대한 집요한 묘사
7, 80년대의 문학작품들이 현실의 정치적 상황을 그려내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리얼리즘의 문제를 부각시킬 때 이제하의 소설이 보여준, 그 스스로 ‘망상’이라 부른 환상적 상상력의 세계는 오히려 더욱 치열한 리얼리즘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지는 환상과 상상력의 세계는 개인이 겪는 현실의 악몽과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부세계에서 가해지는 폭력과의 대치가 아닌 개인에게 심어진 현실의 상황에서 비롯된 자아의 광기와, 어떠한 해결점도 찾을 수 없는 무력감에서 시작된 자기파괴의 욕망이 잔인하리만치 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4·19혁명을 거쳐온 남자가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는 무력한 치한으로 변모해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난 '자매일기'나, 낯선 남자가 누이동생과 정사를 벌이는 근친상간의 끔찍한 현실 앞에서 잠 속으로 빠져들기만 하는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이나, 누드 모델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심약한 색맹의 미술학도가 등장하는 '물의 기원'에서 보여지듯이 이제하 소설의 인물들은 무력하고 동시에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경호는 “이제하의 소설에서 고요함은, 혹은 내면화는 공포를 견디면서 타인과의 결속을 도모하는 가장 효과적인 삶의 자세로 상찬을 받는다.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공포를 주체적으로 내면화하지 못할 때 자기파멸의 광기를 과시하거나 자포자기의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그 삶은 비극적이다. 이제하의 소설은 그러한 삶의 비극성을 묘사하는 데 장기를 발휘한다”고 이제하의 소설을 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