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한 용서
용서라는 위대한 행위에 대해
다시 혹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책
용서란 항상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 이해한다고 무조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_ 한나 아렌트
*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다. _ 자크 데리다
보상이나 참회가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가능할까
용서, 참으로 거창한 말이다. 물론 일상에서 우리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또 자주 듣는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용서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좀 더 큰 상처를 입히고 도덕적 무게와 책임을 수반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떨까? 개개인의 용서를 가볍게 취급할 수도 없지만, 그 본질과 가능성을 다시 배움으로써 용서에 배인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전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한 참회의 기준은 무엇일까? 완전한 용서가 있을까? 용서의 자격과 권한은 누구에게 있을까?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의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이 하나님을 믿고 모든 죄를 모두 용서받았다고 간증하자 그녀는 분노한다.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사해주었다고요?”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인 저자의 『조금 불편한 용서』에도 수없이 많은 상처 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 총기 난사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엄마,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남자. 이들을 통해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힘들고 또 용기가 필요한 행동인지 알게 된다. 저자가 이야기한 대로 우리는 모두 ‘기브 앤 테이크’에 익숙해져 있다. 내가 하나를 주면 나도 하나 이상은 받아야 하고, 내가 손해를 보면 그 상대도 손해를 봤으면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서도 같은 개념일까? 그 대가를 받지 못해도 용서라는 것이 가능할까?
용서의 본질에는 포기의 부정성이 짙게 배어 있다. 보복과 앙갚음, 대가, 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슬픔과 상처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 위대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용서는 어렵다. 저자의 말대로 “논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다.” 고통에 대한 대가를 돌려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 프리드리히 니체 등 용서를 언급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이유를 추적한 끝에, 저자는 우리가 더 이상 희생자에 머무르지 않고 당당한 주체로 변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