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이 책에서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계속 살고, 계속 살리는 일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 거리 위의 고통을 고발하는 일과 몸의 고통을 살아가는 일을 함께 말하고자 했다. 질병, 나이 듦, 돌봄이라는 의제에서 사회적 맥락과 구성을 인지하면서도 지금 마주한 나날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
아플 때를 비롯해 고통의 시기에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중요한지, 그런 시기를 지나보거나 지켜본 적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안다. 그런 땐 말과 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말은 거의 살이며, 말은 살리고 죽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전부 현시한다.
지금 아픈 이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 나이 들어가며 혹은 나이 들어가는 가까운 이를 보며 불안하고 겁나는 이들, 자신이 지나온 악몽 같은 시간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이 책이 약상자였으면 한다. 이 책의 단 한마디라도 가닿는다면, 그래서 그 한마디가 덜 아픈 살로 돋아난다면 그보다 더 기쁘고 놀라운 일은 없겠다. 또한 이 책이 공구상자였으면 한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아프고 늙을 수 있는 사회, 정의로우며 심지어 기쁜 돌봄이 있는 사회라는 이상을 현실로 당겨오는 데 쓰일 도구를 담고 있었으면 한다. 우리를 낫게 할 말, 동시에 사회를 부수고 다시 지을 말을 만들고 싶다는 터무니없이 큰 욕심에서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탄생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소개
저 : 김영옥
익히고 배우는 여러 단계들을 지나왔다. 인문학이라 불리는 텍스트들과 함께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배웠고,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그 법이 많은 경우 오류거나 나르시시즘이거나 권력의 오/작동이라는 것을 배웠고,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몸들의 정치적 연대를 배웠다. 그러다가 격한 갱년기와 예기치 않은 입원생활, 희박해진 면역력으로 몸의 언어를 만났다. 앞선 배움의 형태와 내용은 뒤이은 배움의 과정 속에서 갈등과 질문으로 살아남아 매 단계 배움의 놀라움과 즐거움을 그만큼 복잡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 배움이 가장 어렵고 불가사의하다. 이 몸의 지식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 누구를 만나게 할지? 기다리는 마음으로 배우고 있다.
저 : 이지은
과학기술과 의료의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느리게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쓰며 살고 있다. 시간이 몸에 남기는 흔적을 지울 수 있다는 생명과학기술의 약속에 관해 공부하던 중, 노화와 질병에 대한 불안을 직면해야겠다는 생각에 ‘치매’를 포함한 노인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픈 몸으로 사는 삶, 혹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삶이 살아낼 만한, 살아볼 만한, 해볼 만한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치매’에 걸릴 준비를 하며 산다.
저 : 전희경
페미니즘을 끝없이 펼쳐진 언어, 해석, 정치학의 들판이라 생각하다가, 내가 그 들판을 계속 달려갈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드넓은 들판에도 무섭고 인기 없는 장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발, 환자용 변기, 보호자 침대, 욕창방지매트, 장례식장, 울음을 터뜨렸던 병명… 이런 것들을 지나오면서, 아픈 사람의 페미니즘 혹은 돌보는 사람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고민하고 있다. 언어가 멈추는 곳에서 필요한 문장이 태어나게 하려고 씨름하는 것이 연구자라면, 정치학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운동을 만들어내려 애쓰는 것이 활동가라면, 우선은 ‘연구활동가’라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편 : 메이
여성학을 공부한 후, 30대를 아프며 보내다보니 고통과 질병 이야기를 읽고 쓰고 번역하는 사람이 됐다. 말과 몸과 세계가 조응함을 알기에 언어를 다루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이 일이 병 이전과 이후를 연결해 줄 것이며 또한 ‘목격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임임을 알기에 한다. 내 의지보다는 몸의 의지를 따라 사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론 흥미진진하고 앞으로 또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 궁금하다. 일단 지금은 아픈 사람들이 남긴 아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기획 :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나이/듦, 질병, 돌봄, 노년, 세대, 시간, 죽음 등을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문제화’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고자 하는 연구소다. 어떤 시대의 평범한 여자이름 〈옥희〉가 주는 느낌처럼 더 많은 시민들과 편하게 소통하고 싶고, 제도 아카데미의 담을 허물고자 하는 〈살롱〉답게 의미 있는 연구와 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연구소의 정체성에 딱 맞게(?) 연구활동가들부터가 아프고 돌보고 나이 드는 중이라, 시름시름 연구하고 느릿느릿 활동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실험 중이기도 하다. 136명의 옥희살롱 회원들이 꾸준한 지지와 후원으로 뒷배가 되어준 덕분에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