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아픈 사랑에 답하다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하는 ‘사랑’에 관한 냉혹한 해부
‘아프니까 사랑하지 말까?’ 사랑은 하지만 한쪽에서는 사랑의 아픔이 암세포처럼 번식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빠지고 앞으로도 사랑을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책은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의 관점에서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혼란에 빠지는 낯선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아픔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한다. 정신 분석 전문의인 저자는 낯선 무의식의 세계까지 독자를 끌고 들어가 기꺼이 심리 롤러코스터에 태운다. 아픈 사랑의 뿌리부터 여행을 시작해 갖가지 사랑을 좌지우지하는 심리적 요인을 파헤치는 지식 전개가 꽉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종착역에서 우리는 진실이라고 고개를 주억이던 사랑의 개념들이 실은 씻을 수 없는 오해의 불씨가 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약 그걸 이해한다면, 사랑이 아프지 않을까? 아니다. 남녀의 차이를 안다고 해서 사랑의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이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왔다. 자크 라캉이 말했듯 ‘모체 상실에 따른 근원적 상실감’이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고, 그래서 사랑이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된다.
사랑이 아픈 근본적 원인 그리고 깊숙한 심리로부터의 카타르시스
아무리 사랑해도 채워지지 않아
사랑을 하지 않을 때도 외롭고 사랑을 해도 외롭다. 그것은 에덴동산이요 낙원이었던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 경험하는 엄청난 상실감 때문이다. 이 상실감의 기억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감정을 소통시키고 싶어 하는 기본 동력으로 작동된다. 다시 말하면, 이 근원적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과 사랑을 찾아 방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어떤 상대를 찾아 사랑에 빠지더라도 그 상실의 텅 빈 구멍이 완전히 메워지기란 불가능하다. 사랑이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을 하면 일시적으로 상실감이 메워지기도 한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 마치 지금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일시적으로 상실감을 메워주었던 사랑의 열정과 기쁨이 잦아들면 다시금 그 빈 곳의 허전함은 모습을 드려낸다. 사랑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랑도 우리의 근본적인 외로움은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당신의 사랑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너를 가지고 싶어
사랑에 있어 가장 두려운 적 중 하나는 서로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사랑이 TV나 음식처럼 소유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사랑’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행동들’뿐이다. 사랑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은 ‘사랑의 행동들’을 소유하려 한다. 오직 나하고만 차를 마셔야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은 내가 유일하기만을 바란다. 행동을 독점하려는 소유욕은 점점 자라,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기억이 담겨 있는지조차 모두 알아야만 마음이 놓인다. 외쳐보자. ‘내가 니꺼야?’
가볍게 섹스하고 쿨하게 헤어지자
가볍게 상대를 만난다. 깔끔하게 성애를 나누고 쿨하게 헤어진다. 이게 더없이 만족스럽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므로 아무도 뭐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이 주는 고통이 싫어 택한 가벼운 사랑 혹은 사랑 없는 섹스가 여전히 내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면 그건 분명 까닭이 있다. 이 한없이 가벼운 사랑 방식의 이면에는 인관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거부와 두려움이 숨어 있다. 그리고 한 겹 더 들어간 깊은 무의식 속에는 타인과의 진실한 관계를 애타게 갈망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사랑이 주는 고통이 싫어 한없이 가벼운 사랑만을 반복한다면 고통스런 내면에 숨어 있는 이유들을 찾아내 그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순종과 인내만으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어
늘 남을 이해해야 한다고 느끼고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도 그건 그 사람의 특성이니까 이해하려고 다짐한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내가 양보한다. 이 정도 희생쯤이야 하면서 끝도 없는 양보와 손해를 감수하려 든다. 그 마음속에는 ‘나도 그만큼 남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애처로운 소망이 담겨 있다. 결국 누군가가 알아주겠지 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지금 사랑 방식이 순종과 적응, 인내로만 점철되어 있다면 그 사랑은 이미 무너진 사랑이다. 자신 없고 무기력한 행동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달라졌을 때 무언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왜 항상 똑같은 사람과 사랑하게 되는 거지
우리가 남과 맺는 관계방식은 너무나 비슷하다. 특히나 그것이 사랑이었을 경우에는 본인조차 지긋지긋할 정도로 복사판 사랑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 전적으로 상대에게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쁘기 때문에 사랑하고, 착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믿음직스럽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이미 내가 사랑할 상대에 대한 그림이 마음속에 그려져 있고 내가 그린 환상과 어느 한구석이라도 닮은 자가 나타나면 그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바뀌어도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대상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혼란스런 섹스에 대해 심리학이 답하다
섹스에는 행동하는 나와 감시하는 나가 혼재한다. 감시하는 나는 양심 또는 초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완벽함의 기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이상 행동하는 나는 더럽고 죄 많은 존재로 비춰지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은 나 자신이다. 자신의 판단과 가치관에 따라 적절히 통합해 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 통합의 과정이 성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