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그래, 난 사랑에 미쳤다. 미쳐버렸다.
이미 치유 불가능한 중증이 되어버린 나는……
우리가 홀로 외로이 있을 때는 당당한 자부심 따위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서른여섯의 노처녀다. 직업은 피부과 페이닥터. 하나하나 뜯어보면 꽤 괜찮게 생긴 이목구비임에도 불구하고 조합, 배치상의 문제로 ‘예쁘다’는 말과는 인연이 없다. 몸매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팔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와도 무관하게 살아왔다. 슬픈 짝사랑이나 비참한 외사랑이 남자와 관계된 내 추억의 전부다.
고단한 페이닥터의 따분한 일상……. 여전히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던 나는, 어느 날 병원 원장과 사고를 쳐버린다. 숫처녀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싶어 호기를 부린 것이다.
뜻밖에도 그 남자는 내게 청혼을 해왔다. ‘무난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애틋한 연애결혼을 하고 싶어서 여태껏 선 한번 안 보고 버텨왔던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동생이 그의 아이를 가져버렸다.
나는 운명적인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말한다. 몸은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에로스뿐이라고. 자유분방한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은 서서히 나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세상엔 수많은 내연(內緣)이 존재한다. 불륜, 근친애, 그리고 동성애……. 알려져선 안 될 그 은밀한 인연들……. 드디어 내게도 비밀이 생겼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어느 날, 그녀는 내게 갑자기 등을 돌린다. 언젠가 그녀가 말했었다.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난 미쳤다. 미쳐버렸다. 이미 치유 불가능한 중증이 되어버린 나는, ‘친구’라는 허울을 쓰고 그녀 곁을 하염없이 맴돌기 시작한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사탄이 되겠다는 각오로…….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드디어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