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
“용서하세요.
그러면 엄마별이 당신의 슬픔을 따뜻이 감쌀 거예요”
타인의 불행을 제 일처럼 먼저 깊이 아파할 줄 아는 작가 차인표,
그가 10여 년간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
잘 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들꽃과 제비와 순이와 용이가 뛰놀던 곳.
잘 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별과 바람과 만남과 헤어짐이 살았던 곳.
잘 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엄마 잃은 아기 호랑이에게 젖 먹이던 산골 마을.
그 평화 어느덧 사라지고 슬픔만 남게 된
잘 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선 굵은 연기와 올곧은 신념에 따른 출연작 결정, 사회봉사로 폭넓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배우 차인표 씨의 장편소설 『잘 가요 언덕』이 출간된다.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어 쓴 이 소설에서 지은이가 ‘평화’와 ‘용서’라는 주제의식을 하나의 속도감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솜씨는 가히 수준급이어서, 독자는 탄탄한 스토리에 단번에 빨려들어 가며 저력 있는 신예의 탄생을 확인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추천의 글에서 이 작품을 “배우 차인표가 아닌 작가 차인표의 행보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역작”이라고 표현하면서 “작가의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솜씨”를 극찬하기도 했다.
10년 세월의 무게가 담긴 역작
지은이가 처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에 끌려가셨다가, 지난 1997년 잠시 한국에 오셨던, 작은 몸에 크고 고운 눈을 가진” ‘훈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도한 TV 뉴스를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훈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할머니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나쁜 무리들을 향한 분노와 우리 할머니들을 보호하지 못한 할아버지들에 대한 서운함”이 가슴을 꽉 채웠고, “우리나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약하고 못 살던 시절, 그 형편없던 시절을 버텨낸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써내려갔다는 이 소설에는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는 저자의 예민한 감성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아직 채 치유되지 않은 민족사의 상처를 응시하는 저자의 진중한 시선이 담겨 있다. 집필, 초고 완성, 교정, 원고 유실, 재집필, 수정 원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린 셈인데, 그동안 저자는 백두산 현지답사와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드리며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해왔다.
『잘 가요 언덕』에서 독자는 작가의 치열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은 호랑이 마을의 풍경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이야기를 밀도 있게 끌어가면서도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는 솜씨며, 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서술은 작가가 그간 만만치 않은 내공을 쌓아왔음을 보여준다.
잘 가요 언덕, 용서와 화해의 공간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 백두산 자락의 호랑이 마을. 엄마를 해친 호랑이를 잡아 복수하기 위해 호랑이 마을을 찾아온 소년포수 용이, 촌장 댁 손녀딸 순이, 그리고 일본군 장교 가즈오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지은이는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맑고 그리운 사랑을 들려주기도 하고,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권정생의 『몽실 언니』처럼 굴곡진 민족사의 흐름과 함께한 한 여인의 아픔을 웅숭깊게 그려내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로인가. 이 소설에는 악과 고통이라는 현실은 엄존하지만 절대적인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어떤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연유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마을에 침입해 들어와 가축을 물어가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호랑이 육발이조차 지켜야 할 새끼가 있었기 때문에 강한 것으로 그려지고, 일본군 장교 가즈오는 대동아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꿈에 부푼 애국자로 자원입대했다가 이 끔찍한 전쟁의 실체를 깨닫고는 순박한 호랑이 마을 주민을 편들게 된다. 하여 독자는 작품에서 악역을 맡은 이조차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잘 가요 언덕은 가해자에 대한 이해와 피해자에 대한 깊은 연민이 어우러진 용서와 화해의 공간으로 독자에게 각인된다. 운명은 이들을 폭풍 속으로 데려가지만, 마을 입구 잘 가요 언덕의 꿀밤나무는 이들의 웃음과 눈물을 나이테 하나하나마다 새겨놓았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루빨리 사라져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일본 가해자들의 생각을 개탄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그들이 할머니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할머니들 역시 진심으로 사죄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는 저자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위안부 문제를 풀어갈 한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파에 지친 독자의 슬픔을 다독이는 엄마별 같은 이야기
해설을 쓴 소설가 김탁환은 지은이를 일러 ‘슬픔을 아는 이’라고 평했다. “슬픔을 아는 이와 마주앉으면 아득해집니다. 더구나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사막 같은 슬픔이라면, 묻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어떻게 안으로 우는 법을 배웠습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슬픔을 품고 다니며 어루만지도록 했습니까. (……) 글을 통해 특히 그가 만든 이야기 한 자락에서, 저는 그를 알아버렸습니다. 작가 차인표는 타인의 불행을 제 일처럼 먼저 깊이 아파하는 재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맑은 단어와 단정한 문장 속에서 그 슬픔을 다독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공유하는 용이와 순이의 앞에는 더 아프고 슬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끝내 비탄에 빠지지 않고 그 슬픔을 묵묵히 견뎌나가는 모습에서 독자는 막막한 슬픔의 강을 건너는 자신과 이웃들에게 필요한 위로를 얻게 된다. 유례없는 경제위기, 용산 참사와 연쇄살인 등 온갖 비극적인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 시대, 어지간한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는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슬픔에 지쳐버린 독자들에게 작가는 이 길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자그마한 위로를 건네며, 슬픔에 빠진 이웃의 손을 잡고 현실을 헤쳐 나가라고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