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유산
“일본에서 백만 독자를 울린 언어의 연금술사, 나오키상 수상작가
다치하라 마사키(본명 김윤규)의 자전적 소설”
“이 작품은 그의 영혼과 육신의 고향에서 유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평론가의 한 사람인 요시다 세이이치(吉田精一)는 소설 『겨울의 유산』을 작가에게 있어서 ‘더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영혼과 육신의 고향”에 방점을 찍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을 떠나 일본에 정착한 김윤규(金胤奎)는 조센징(朝鮮人)임을 드러내지 않고 다치하라 마사키(立原正秋)라는 이름으로 일본문단의 대표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아쿠다카와상 후보에 오르고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백만 독자를 울린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린 그는 작가로서 절정기에 서있던 사십 대 후반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다치하라는 ‘일본 중세문학의 역사적 실현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면서 ‘창작의 출발점은 모두 이 풍토’라고 강조했던 가장 일본인다운 작가였기에 그의 뿌리를 밝힌 이 자전적 소설의 발표는 하나의 전복적 사건이 되었다.
강렬한 기백이 관통하고 있는 선(禪) 소설의 정수
“이 작품에는 그의 다른 단편이나 장편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하고 정교하며 치밀한 구성이 눈에 띄지 않으나 그 대신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의 풍물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고, 자신의 세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인물들이 점재(点在)해 있다. 작품 중에 인용된 공안이나 사제 간의 대화도 선림(禪林)의 독특한 분위기를 짙게 그려내었다.” _ 요시다 세이이치
이 소설은 다치하라의 선승(禪僧)과 같은 기질과 평소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심취하며 ‘중세의 미적 이념’을 추구한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일본에 있어서 선불교가 확립된 시기가 중세였다는 것을 상기할 때, 한?일 간의 민족갈등을 넘어서는 근원적 ‘풍토’의 모색이 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탈근대의 논쟁이 잦아들고 탈 식민주의가 주류 담론으로 떠오른 이 시대에 청산해야 할 것과 회복되어야 할 것에 대한 성숙한 고뇌를 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1970년대에 발표한 이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여 우리 사회에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줄거리 소개
어린 시절에 가족의 해체와 절대고독을 경험했지만
이제 아버지를, 아버지의 나라를 따뜻하게 추억한다.
『겨울의 유산』은 ‘행복감과 무상감 사이(유년시대)’ ‘무량사 토담길(소년시대)’ ‘건각사 산문 앞’의 세 편으로 이루어졌다.
유년시절을 그린 ‘행복감과 무상감 사이’는 여섯 살 되던 해 주인공인 ‘내’가 아버지의 뜻으로 아버지가 승려로 있는 무량사의 선방에 취학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혼혈로 구한말의 귀족 출신이다. 교토 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한때 군대에 적을 두었던 일도 있었다. 지금은 무량사(실은 안동시 근교의 천등산 봉정사)의 승려가 되었다.
작품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한없는 무상감은 그가 선방으로 들어간 그 해 겨울, 아버지의 자결을 계기로 심화된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는 눈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떠밀어 버렸으나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대상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량사 토담길’은 유년시절에 이어 1933년 안동 심상소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에 ‘나’는 어머니가 재혼하는 와중에 경북 구미의 외숙부에게로, 다시 재혼해 간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가게 된다. 특히 구미 시절, 외숙부 없이 1년 8개월을 혼자 지내면서 이 기간의 생활이 “나의 내면에 공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훗날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무량사의 무용 송계 큰스님과 허백당 청안이다. 임제선풍을 오롯이 잇고 있는 이들 선사로부터 정서와 윤리의 모본을 배우고, 아버지의 그림자와의 끊임없는 교류가 ‘나’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를 형성한다.
‘건각사 산문 앞’은 소년시대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였고, 한 살 연하의 요네모토 미쓰요와 결혼하였다. 작품 속에서 아내를 얻을 때까지의 과정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고, 산월이 가까워진 그녀가 출산하기까지의 과정만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이러한 속세의 생활 한편으로, 건각사에서의 그의 선 수행이 중심이 되어 기술되어 있다. 유년시절로부터의 한 줄기 굵은 맥이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로부터 버려지며, 대여섯 살 때부터 선사(禪寺)에 몸을 의지하며 좌선과 게문(偈文)을 가까이 한 ‘나’는 혼혈의 문제도 안고 있어, 고독한 삶의 뒤안길에서 무한과 무상을 본다.